완벽한 도덕군자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흠잡을 데라곤 찾을 수 없이 참 훌륭해 보입니다. 좋은 일도 많이 하니 더할 나위 없는데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자선을 베풀면서 그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들 위에 올라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우월감과 만족감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공적을 근거로 은연중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수도 있는데요.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중세 마지막 철학자요, 추기경이었던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분석합니다.
모든 억압의 핵심은,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모든 문제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다”라는 명제를 진리로 고집하는 것이다. 즉, 무오한 자기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이 억압의 정체다. 자기를 비판적으로 끊임없이 점검하는 도덕주의 또한 그러한 비판과 성찰의 품새를 통해 실제로는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억압이다. 스스로가 깨끗한 척, 또는 깨끗함을 위해 노력하는 척 하는 일을 그만둘 때, 자유는 개방된다. –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박학한 무지>
[도덕이 필요할 때]
일상생활에서 도덕은 개인과 사회를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약자가 어려움을 당할 때 법과 정의에 앞서 도덕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맹자의 사단칠정(四端七情)도 이를 가르치고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자칫 도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를 엄격하게 점검하고 남들에게 흠결이 없게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오직 도덕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다른 것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고려하지도 않는 자세인데요. 그러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도덕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쿠자누스가 억압이 된다고 말한 것도 도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일컫습니다.
때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도덕과는 달리 도덕주의는 반대로 사람을 죽인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도덕을 명분으로 정치와 얽혀 권력을 행사하면서 이런 비극을 벌인 경우도 적지 않은데요.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사회적 매장이나 인격적인 매도와 같은 폭력도 도덕적 근거를 명분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디지털 문명의 발달로 인한 잘못된 정보가 급속하게 확산함으로써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에는 대책을 세울 겨를도 없이 당하도록 몰아가니 참으로 무섭기까지 합니다. 그런 점에서라도 차제에 이를 되돌아 살펴야 합니다.
[선과 악,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
어떻게 살필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 안에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남은 몰라도 나는 도덕적으로 언제나 옳고 깨끗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에는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사실 이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이미 개인과 사회에 선과 악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엄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데 혼자만 깨끗하다는 독선이 오히려 잘못입니다. 그러나 선과 악이 그렇게 뒤섞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혼란스러워 보여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헤어 나올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보다 확실하고 멋지게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정체성(identity)이란 변화무쌍한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유지되는 동일성(identity)을 뿌리로 하고 있는데요. 영어 표기가 같은 것도 직접적으로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를 언제나 ‘같음’으로 세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는 같고 타인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우는 자기는 ‘같음’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같음은 언제나 옳다는 것인데요.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같음과 옳음을 하나로 묶어 ‘무오한 자기정체성’을 주장합니다. 반대로 타인은 ‘다름’입니다. 그런데 다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름입니다. 역시 같은 논리로 엮어진 판단인데요. 말하자면 자기와 같으면 옳고 자기와 다르면 틀리다고 합니다. 영어 표기를 또 써본다면, different일 뿐인데 wrong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왜 틀린 것인가요? 그러기에 현대 심리학자도 화답합니다.
항상 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도덕적 거인이 아니라 그저 까다로운 사람이 된다. 오히려 우리는 양쪽 모두에 더 민감해지도록 성장해야 한다. 도덕적 생활은 선악의 변증법이다. … 우리 모두 안에 선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을 도덕적으로 오만하지 못하게 해준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바로 이 한계를 깨달을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롤로 메이, <권력과 거짓순수>
그러니까 자신에게 끊임없이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고 이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도덕의 완성이 아니라 강박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도덕적인 삶은 ‘선악의 변증법’ 즉 선과 악이 공존할 뿐 아니라 뒤얽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선악의 혼재라는 한계를 인정할 때 용서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급기야 쿠자누스는 스스로를 악마로 자각하는 것이 오히려 도덕적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악을 잘 이해하는 자, 자신의 악에 대한 전문가, 곧 악의 담지자인 악마로서만이 역설적으로 도덕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악마는 유한자의 겸허한 윤리적 표상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