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많은 부분은 우연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예를 들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태어난 것, 바퀴벌레가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것,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의 부모를 통해서 태어난 것 모두 우연입니다. 사실 삶의 모든 과정은 우연의 연속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매 순간은 유일한 사건입니다. 물론 때로는 비슷해 보이는 일들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연의 일치’라고 합니다. 우연을 마냥 견디기 어려워 실마리라도 있으면 그렇게 묶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더 일어나면 거의 필연이 됩니다. 법칙이나 패턴이 추려지기도 하지요. 심지어 그것으로 끝나도 말입니다. 서양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은 순간이고, 두 번은 우연이다. 그러나 세 번째부터는 패턴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연’과 ‘필연’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이렇게 단 한 번의 차이로 갈라지니 말입니다. 단 한 번의 순간이 정반대의 길을 가도록 만드는 겁니다.
[우연과 필연 사이]
이런 이유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도 합니다. 순간적인 선택으로 횡재 같은 행운을 누리기도 하고 일생을 망치거나 후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순간으로 초점을 맞추면 잘된 경우보다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월등히 많은 것 같습니다. 망치는 것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순간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돈을 버는 것은 힘든데, 쓰는 것은 쉽다는 것도 견주어질 수 있습니다. 평생 애써 일하고 받은 퇴직금을 한순간 날려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일순간에 벌어들인 돈을 천천히 쓰면서 즐기는 경우를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처럼 순간은 중요하지만 그런 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의 시제는 언제일까요? 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굳이 시간의 길이를 잰다면 찰나에 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짧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토록 중요한 순간을 찰나처럼 흘려보내곤 합니다. 그러면 순간은 이내 과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현재인 순간을 잡지 못하고 찰나로 보내고서는 중요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순간을 현재에서 잡아 느끼고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현재를 사랑하라’(Carpe diem)는 말도 순간의 이런 소용돌이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앞서 우연과 필연이 단 한 순간의 차이로 벌어지는 갈래라는 점을 주목하자고 했습니다. 우연은 여전히 순간의 일회성에 무게를 두되 단순 반복이 일어난 경우에 해당하니 미래를 예측할 근거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비해 필연은 비슷한 일이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을 예상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좀 더 지속되면 규칙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우연과 필연 사이는 생각만큼 멀거나 크지 않습니다. 무엇을 주목해야 할까요? 우연과 필연 사이의 거리가 그토록 짧다면, 좀 더 길게 보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고 또 달리 보면 필연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갇힐 수도 있지만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삶은 개연이다]
현대 양자물리학은 이 세계에 우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차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종래 과학에서는 당혹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데, 이제는 과감하게 인정합니다. 우발성과 예측 불가가 신화에서만이 아니라 법칙을 중요시하는 과학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과학을 떠받치고 있던 필연성의 신화가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우연(偶然)에 주목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니 불안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필연(必然)으로 싸잡으려니 여의치 않을뿐더러 설령 가능하더라도 꼼짝달싹할 수 없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개연(蓋然)’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사실 삶은 그렇게 생겼습니다. 개연이란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럴 것 같은 상태를 말하는데, 이를 견디기 어려워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었다면, 어차피 한순간 차이라면, 이제는 과감하게 ‘개연’으로 우리 스스로 풀어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삶이 개연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의외로 우리를 옥조이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삶은 우연만으로는 대책을 세울 수도 없고 필연으로 잇는다고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사실 운명이라고 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필연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측을 넘어서는 우발성에 주목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운명도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운명을 자유와 연관하여 곱씹어 볼 수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하나로만 붙잡으려고 하기 보다는 삶의 소용돌이를 헤쳐 가는 개연의 지혜를 도모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길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