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전 세계를 뒤덮은 팬데믹이 3년 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백신으로 터널의 끝을 보리라 기대했었지만 앞으로 상황을 가늠하는 것이 만만치 않을 듯합니다. 첨단과학과 의학의 혜택을 어느 시대보다 더 크게 누려왔던 오늘날의 인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생명과 건강에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구를 장악하고 우주로 날아갈 것 같았던 인간은 어처구니없게도 한갓 미물의 포로가 된 것 같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으면서 남북극에 묶여 있던 인류 출현 이전의 바이러스 역시 언제 어느 곳에서 우리들을 공격할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최근 20년 사이에는 수 백 만년 된 미생물들이 연구실에서 줄줄이 소생되었다 하니 만약 이런 것들이 인간의 손을 떠나면 어떤 흉측한 괴물이 되어 다시 인간을 공격할지 그 섬뜩함은 상상조차하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몸 안에 서식하는 박테리아 중 99퍼센트는 아직 평화롭게 공존하지만 환경 변화에 의해 어떻게 돌변할지도 알 수 없다고 하니, 지구는 고사하고 우리 몸에 대해서도 우리가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처럼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앎이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삶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 많이 알면 더 좋은 삶이 될 줄로 알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보이는 것에 비해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지, 모름에 비해 우리의 앎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내 주는데요. 덮어버리고 잊어버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모름을 외면한 채, 앎만으로 삶을 살아가려 했던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자가당착인지를 전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모름에 대해서 보다 진솔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앎을 좀 더 늘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인데요. 잘못 알고 있었던 모름도 있고, 아직 알지 못한 모름도 있는 것은 물론, 아예 알 수 없는 모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모름’의 뜻을 새기면서 삶에 대해 새삼스레 조신해야 하겠죠.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모름을 더듬음으로써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을 보다 더 찬찬히 그리고 더 촉촉하게 살아갈 길을 도모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달리기만 할 일이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인류문명사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오랜 시 한 구절을 떠올려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라는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시 첫 구절입니다.
물론 이 구절의 속뜻은 다르겠지만, 문장만 두고 생각해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과연 삶이 우리를 속이던가요? 만약 삶이 우리를 속인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데에서 비롯된 착각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불일치의 책임은
삶이 아닌 앎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삶은 내가 어찌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살아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고 있으니 속이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미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삶에서 앎이 나름대로 추려보는데 이것이 삶에 대해 수시로 어긋나니 애꿎게 삶이 속인다고 했을 뿐이지요. 즉, 우리는 나의 앎으로 삶을 재단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앎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즉 속이는 것도 앎이고 속는 것도 앎인 것입니다. 끄러나 이것은 앎의 차원에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삶에 비추어서야 비로소 힐끗 보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과 앎 사이의 어디에 걸쳐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앎이 이처럼 우리를 속일지라도 모름에 둘러싸인 우리는 이제 이런 물음으로 삶의 매순간을 즈려밟아가는 지혜의 길을 더듬어야할 듯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속이기도 하고 속아 넘어가기도 하는 앎인 지식과는 다릅니다.
지식은 곧 앎이죠. 그래서 더 늘이고 채우려고 하는데요. 그러나 지식이 늘어난다고 삶이 더 행복해지거나 여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지식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는 것 못지않게 우리를 가두고 속이니 삶을 힘들게 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다릅니다. 지혜는 이런 삶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시도에서 나온 깨달음인데요. 단순 정보로 추려지는 앎을 넘어서 삶으로 들어가 더듬으며 새롭게 일구어내는 길이니 통찰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그런 통찰을 함께 도모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상식의 허점을 들추어내고 그 안에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는 반전과도 같은 발상의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삶에서 보다 넉넉하게 자유를 누리며 풍성하게 살아가는 길을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철학적으로는 ‘역설적 통찰’이라고도 하는데요. 보다 일상적인 사례에서 시작해 깊은 인문학적 성찰을 접목함으로써 상식의 확장을 꾀하기보다는 일상의 사고가 깨지면서 다다르는 깨달음이라는 목표로 향하고자 합니다. 즉, 앞으로 이어질 강의에서는 지식(knowledge)보다 지혜(wisdom)를 추구하며,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통찰(insight)을 도모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