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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가?

정재현 교수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판단이든지 항상 옳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 좋은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요?
이를 가늠하게 해 주는 지혜의 구절이 있어 함께 곱씹어 보려고 합니다. 널리 알려진 금강경에 대한 다섯 주석서인 오가해에서 나오는 경구입니다. 본디 첫 행만으로 전개되지만 그 뜻을 새기기 위해서 네 단계로 돌리는 풀이도 있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오는데 그 과정이 물고 물려 있습니다. 보다시피 첫째 행과 마지막 행이 똑같습니다. 그 사이에 둘째 행은 첫째 행을 부정하는 것 같고 셋째는 아예 뒤집어 황당무계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더니 넷째 행은 첫째 행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겉보기는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니 따라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둘째와 셋째에 앞선 첫째와 마지막 행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먼저 첫째 행은 같은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사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산은’이라는 주어를 먼저 봅시다. 주격조사 ‘은’ 앞에 있는 ‘산’은 과연 언제 어디서나 산입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은 것이 아니니 그만한 판단 과정을 거쳤습니다.
즉, ‘산은’이라는 주어는 ‘이것은 산이다’라는 판단을 앞서 깔고 있습니다. ‘-이다’라고 하니 본질 판단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산이다’라는 본질 판단도 그 아래 더 깊은 뿌리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없지 않고 있다’는 판단입니다. ‘- 있다’는 것이니 존재 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존재 판단과 본질 판단이 결합해서 ‘없지 않고 있는 그 무엇이 산이다’라는 데에 이름으로써 비로소 ‘산은’이라는 주어가 성립합니다. 그러니 주어는 단순히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가 아니라 그 아래 ‘이다’를, 그리고 또 그 아래 ‘있다’를 깔고서야 비로소 가능한 사건이고 따라서 동사입니다.
다만 문장 구조에서 주어에 위치하니 명사의 모양을 취할 뿐입니다. 무릇 모든 명사들이 그러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주어라고 해서 어떠한 전제도 없이 무조건 옳게 확정되고 고정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무조건 그렇게 보려고 합니다. 금강경의 이 말씀은 이를 꿰뚫어 보라는 일침입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둘째 행은 그렇게 주어를 부정합니다. 딱히 부정한다기보다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고 간주되는 것이 과연 언제 어디서나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을 되묻자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은 산이다’를 ‘산은 산이 아니다’로 일단 주어를 부정하니 없을 수도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심지어 산이 아닌 것을 산이라고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되돌아 살피자는 것입니다. 시작하는 주어부터 들추고 파보니 산이 깡그리 산이라고 할 수 없을뿐더러 내가 보는 대로의 산만 산이 아니니 그런 식으로 산을 규정해서 마땅한 주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주어에서든지 그것이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보고 내가 아는 것이 그것 자체이거나 전부일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이제 셋째 행은 아예 ‘산은 물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황당한 궤변이 있을까요? 둘째 행이 주어 부정이라면 이것은 술어 부정으로 보입니다. 물론 둘째 행과 셋째 행을 서로 뒤바꾸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어의 판단에 오류 가능성이 있다면, 술어라고 예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서 본대로 주어와 마찬가지로 술어도 그냥 애당초 술어가 아니라 이보다 앞선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가 결합하여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술어도 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산과 물의 관계가 그것을 가리킵니다. 주어와 술어에 걸친 모든 판단에서 오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와 술어에서 그 판단이 부분적이고 편파적이어서 오류일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넷째 행은 다시 시작으로 되돌아옵니다. 이제는 ‘산은 산’이라고 해도 산이 아닐 가능성, 아니 심지어 반대로 물일 가능성을 싸안고서 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 지니고 있는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알량한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통찰입니다. 내가 보고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게 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내가 모두 책임질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눈앞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이 우리에게 수많은 증거들로 이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를 금강경의 이런 혜안으로 본다면 우리 스스로를 가두는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불안과 강박에 내몰리면서 그러는 줄도 모르고 있을 때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억압과 족쇄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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